처음 암 진단을 받은 분들께

오늘은 개인적인 이야기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가끔 멀리 있어서 자주 만나지 못하는 오래된 친구들에게 안부를 묻곤 합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이제는 별 탈 없이 지낸다는 말을 들으면 서로가 안심하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한 친구의 아버지는 암진단을 받았고, 다른 친구의 아버지는 암이 재발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몇 달 전에는 췌장암 진단을 받고 1년간 투병하신 친구 어머니의 조문을 다녀왔습니다. 

서로가 공유한 시간과 추억의 양 때문일까요? 오랜 친구들의 소식은 진료실에서 만나는 환자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우리나라 국민이 기대여명인 83세까지 살 경우 암에 걸릴 확률은 35.5%라고 합니다. 10명 중에 3~4명은 걸리는 셈이죠. 

통계만 놓고 보면 내가 아니더라도, 가족이나 친한 친구 중에 암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없다면, 매우 운이 좋고 그것만으로도 행복의 확률이 조금은 커질 것 같습니다. 

암 발생의 증가는 장수시대에 드리운 어두운 단면 중 하나입니다.

저부터도 그렇겠지만, 암 진단을 받으면 우리는 일단 멘붕에 빠집니다. 이제는 흔해진 병이고 생존율 또한 높아지고 있다고 하지만, 암이란 병명이 가진 힘이 너무도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한 연구 자료에 따르면 진단을 받는 순간 남은 생명 에너지의 절반 정도가 소진된다고 하니, 진단만으로도 엄청난 타격인 셈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많은 분들이 진단을 받은 순간부터 하루라도 빨리 병을 치료하기 위해 서두르기 시작합니다. 

믿기지 않아 다른 병원에서 검사를 받기도 하고, 유명하다는 병원과 의사를 찾고, 여기서도 희망이 보이지 않으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민간의 비법을 찾아 헤매기도 합니다. 

죽음에 가까운 질병일수록 그 시장 또한 치밀하게 형성되어 있어서, 자칫 잘못하면 이 과정에서 병은 물론 남은 인생도 무너지기 쉽지요.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정 수준 이상 진행된 암에서 평범한 일상으로 완벽하게 돌아오는 경우는 매우 드문 것이 현실이고요.

이럴 때면 만병의 황제란 타이틀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그런데 암은 종류나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그렇게 급하게 서둘러야 하는 병은 아닙니다. 

PET CT는 0.5㎜도 가능하지만 일반적으로 진단이 가능한 암의 크기인 1㎝가 되었을 때는 암세포는 약 30번 정도의 세포분열을 마친 상태로, 그 속에는 1700만개 정도의 암세포가 있다고 합니다. 

암은 크기가 약 0.06㎝일 때부터 전이를 시작하기 때문에, 진단을 받았을 때 전이 확률은 약 50% 정도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상황이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10년 정도 걸리고요. 

어떻게 보면 대다수의 암은 천천히 진행되어 축적된 일종의 만성질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조금 시간을 갖고 치료에 뛰어 들어도 늦지 않다는 말이죠.

지난번 인용했던 와인버그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많은 암의 경우 더 많이 살필수록 더 많이 발견된다. 통계는 과거에 많은 암들이 진단되지 않은 채로 증상이 없이 지나쳐 졌다는 것을 보여주며, 이들은 특히 유방암과 전립선암과 같은 호발암의 발생률 증가에 가장 큰 몫의 기여를 했다. 이런 통계들은 많은 암에 있어서 실제로 치료를 필요로 하는 암들의 숫자가 얼마나 큰지 우리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데이터는 또한 많은 암 생물학자들이나 임상 종양학자들의 생각 속에 깊이 박힌, 양성적인 신생물이 빠르든 늦든 언젠가 매우 나쁜 종양으로 발전할 위험이 있다는 견해가 위험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암 역학은 이제 다른 가능성을 제시하는데, 자주 발생하는 종류의 암을 포함해서 많은 종류의 조기암들은 일반인의 평균 수명 동안 악성의 종양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낮다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실제로 공격적인 치료가 필요한 암종과 그렇지 않은 종류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지를 이제야 막 배우기 시작했을 뿐이다.“

- <암의 생물학>(로버트 와인버그 지음, 이한웅 옮김, 월드사이언스 펴냄) 

책에서도 이야기 하지만 진단기술의 발전이 조기암의 발견을 증가시킨 대표적인 사례로 갑상선암과 전립선암을 꼽습니다. 이 두 암은 생존율이 높은 암이기도 하지요. 

어쩌면 우리는 가만 두어도 죽을 때까지 큰 불편함 없는 암을 발견해서 공격적으로 치료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속담에 아는 것이 병이 된다는 게 아마도 이런 경우일 것입니다.

물론 암 진단을 받고 막연히 '괜찮을거야'라고 생각하며 살아서는 안되겠지요. 아마 그럴 수 있는 강심장의 사람도 거의 없을 것입니다. 

만약 그 정도로 태평하고 강한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라면 암에 걸릴지 않거나, 진단을 받으러 가지 않았을 확률이 높을 겁니다. 

다만 중한 병에 걸렸다고 해서 그 병에 남은 인생 자체가 매몰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가벼운 병은 집중해서 그것을 없애면 끝나지만, 암과 같은 중한 병에서는 병과 함께 내 인생 전체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암 진단을 받았다면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천천히 생각하고 선택하길 권합니다. 

중한 병이 확실한 만큼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서 삶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필요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병에 대해 공부하고, 다양한 전문가들과 최신의 연구 결과를 취합해 스스로 생각해서 후회가 없는 방법을 선택하면 좋겠습니다. 

허둥지둥 병에 쫓겨서 그 안에 갇히기 보다는, 스스로 선택한 인생의 여정에서 병을 다루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존엄한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통계상으로는 서로 안부와 위로를 전한 저를 포함한 친구들 4명 중 어쩌면 1명 정도는 암에 걸릴 것입니다. 

피하거나 외면하고 싶고, 불길한 소리이긴 하지만, 엄연한 현실이지요.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 저 자신도 그 순간이 왔을 때 어떤 선택을 할지는 모를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나눈 이야기는 저 스스로 하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김형찬 원장은 생각과 생활이 바뀌면 건강도 바뀐다는 신념을 가지고 서울 명륜동 다연한의원에서 환자분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텃밭 속에 숨은 약초>, <내 몸과 친해지는 생활 한의학>, <50 60 70 한의학> 등의 책을 썼습니다. 본 칼럼의 내용은 유튜브 채널인 <암환자생활교실>에서 시청이 가능합니다. https://youtube.com/@ohkinam